초등학교의 기억

포항 바닷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갈매기 깃털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음) 때도 별달리 친한 친구가 없었다. 반에서, 전교에서 언제나 1등하고 반장, 부반장을 계속 했지만, 딱히 인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당시에는 공부만 잘 하면 자동적으로 대표로 뽑아주는 그런 통념에 아이들이 짓눌려 있었던 듯 하다.

나는 밖에서 놀기보다 혼자 다락방에서 책 읽고 공상하기를 좋아하다보니, 딱히 어울려 놀았던 아이들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떠오르는 초등학교 동년배는 내 괴팍한 성격에 눈물흘렸던 아이들 얼굴들부터 생각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가 뺨 때렸던 여자아이: 이 아이는 엄마 치맛바람을 믿고 얄밉게 굴었던 아이로 기억을 하는데, 그 날 나를 먼저 걷어차서 내가 뺨을 때렸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뺨을 때려보기는 처음이라 그 순간이 기억난다.

내게 호기심을 보이다가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서 내게 걷어차여 안경이 깨지는 수모를 당한 남자 아이: 조금 미안하데이. 그 아이도 내 행동을 그저 경상도식의 격한 감정 표현으로 이해해주었던 것 같다.

새로 입고 간 하얀 투피스에 색물감 물을 엎어 내가 찍어내린 연필심이 머리 정수리에 박혔던 코흘리개 내 짝궁: 과격한 반응은 미안하다만, 뭐, 네가 이, 콧물, 냄새 등으로 나를 얼마나 스트레스 받게 했던지! 그래도 그때 빼고는 전반적으로 나는 친절한 짝꿍이었다.

매일 자습 문제를 칠판에 적어 내는 여학생 두 명을 그 달의 착한 아이로 누군가 추천했을 때 내가 “그것은 의무를 수행한 것이니 선행으로 볼 수 없지 않나?”라고 반박해서 착한 아이 후보에서 제명당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반장이 “이의 없나요?”라는 질문에 그 날만큼은 무언가 다르게 접근해 보고 싶어서 ‘선행은 의무 상 행한 것과는 달라야 하지 않나? 그것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이 추천은 부적절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무언가 논리를 찾았다는 흥분감에 갑자기 그렇게 제안을 했던 것일 뿐이다.

게다가 나의 반박을 다시 반박하는 이가 없어 추천받은 아이들이 후보에서 제외되고 새로운 후보를 고민하던 중, 반장이 부반장이었던 나를 추천했다. 추천 이유는 “열심히 은종을 닦아 선생님 명령을 더 잘 듣게 해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자아중심적 성격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더 큰 아이였다면, 그리고 머리가 아주 빨리 돌아가는 아이였다면 그 즉시 내가 이전 아이들에게 적용했던 논리를 나에게도 적용하여 반대 의견을 냈을 텐데, 나는 심한 자아도취적 성격의 아이여서 그 점을 생각지를 못 했다.

내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나르시즘이 공정과 정의가 나를 검열할 기회를 못 찾게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내게 평생의 마음의 짐이 되었다. 내가 왜 그렇게 치졸했을까라는 자책을 어린 마음에 계속 안고 살았다. 실제 그 두 명의 아이들은 그딴 착한 어린이 추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그런 기억 따위는 까맣게 잊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졸업식 때도 그 두 명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고, 그 두 얼굴은 평생 계속 나를 비웃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당시 아이들이 반대 의견을 내는 습관을 갖추도록 선생들이 교육하지 않았기에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두 명의 자습 담당 아이들을 추천에서 제외시킨 이유를 그대로 내게 적용해서 누군가가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면 나도 바로 깨닫고, 지금까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도 없을텐데 말이다. 내가 그 두 명에게 바로 그런 모순점에 대해 설명하고 내 논리를 끝까지 내게도 적용하지 않았음을 사과했었어야 했는데, 당시 나는 사과를 하는 방법을 몰랐었다.

당시 국민학교에서의 교육은 지루하고 기형적이었다. 단순 주입식 교육이었고, 예체능은 깡그리 무시했었다. 4학년때부터 산수경시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각 학년별로 극소수의 아이들(3-4명 이내)만 모아놓고 선생님들이 별도의 과외 수업을 해 주었다. 그런 과외 수업 시간엔 엄마들이 돌아가며 간식을 사서 배달해 주었는데, 당시 선생님들께 무언가 배웠다는 기억보다 ‘오늘의 간식은 무엇일까?’하며 기다리던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답안지에 kg과 같은 단위를 안 붙였을 때 선생님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기까지 하며 훈련시켰던 기억, 운동회 날에도 운동회 참석은 안 하고 하루종일 과학실에 갇혀서 수학 문제집 한 권을 오전에 통째로 다 풀어버렸던 기억 밖에 안 남아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운동회 연습을 함께 했던 기억도 없고, 같이 어울려 놀던 기억도 많지 않고, 방과 후엔 과학실에서 남자 아이 2명과 자습을 강요당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물론 성실히 자습만 하지는 않았다. 남학새 두 명은 언제나 돋보기를 꺼내 가방 구석구석을 태워 구멍을 내는 것이 취미였고, 나는 어항 속 금붕어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친구, 남자친구의 개념은 너무나도 쑥스러워 나는 역시나 혼자 놀게 되었다. 아이들은 화단을 같이 쓸거나 하면서 친해질 수도 있었는데, 내가 맡은 청소는 선생님이 치는 은종을 닦거나 아니면 아예 청소 의무가 없어 누군가와 딱히 어울려 놀 기회가 없었다.

이것은 모두 당시 아이들에 대한 기초교육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나는 고소공포증도 심했고 겁이 많아 철봉에서 한 바퀴 도는 것도 무서워했었고, 뜀틀은 한 번도 건너뛰어보지 못하고 언제나 걸터앉는데 그쳤고, 공으로 하는 운동은 손이 더러워지고 공에 맞으면 아프다는 이유로 나는 언제나 공을 피해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육 선생님 마저도 내가 체육 시간에 보이는 문제점을 개선해주기보다 나는 체육 빼고 나머지 과목을 다 잘 하니 체육 정도는 못해도 된다는 태도를 보였다. 담임 선생님도 전인교육보다는 오로지 나의 각종 대회 성적, 전체 성적 순위에만 관심을 보이고 관리하였다.

반면 나는 학창 시절에 체육을 제대로 못한 것을 언제나 나의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 때문에 대학원 시절 교내에 붙은 체대의 댄스스포츠 특별 강좌에 갑자기 현혹되게 된 것이다. 무언가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육 수업은 잘 못했지만, 나는 사실 언제나 혼자 있을때면 클래식 음악에도 몸을 흔들며 막춤을 추곤 하는 습관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내 성격이 180도 바뀐 중학교 1학년이 되고 난 이후였다. 초등학교때는 여전히 나는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한 아이였다. 단지 공부를 좀 잘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딜 가나 이목을 끌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내가 먼저 다가서는 연습을 해 보지 못했고(아이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사귀고 싶은 친구를 사귀는 요령도 배우지 못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균형잡힌 성장의 시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내린다.

@Papilione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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