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새에 관심이 있는 국내 탐조인들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카메라 장비 때문에 샵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나거나 아니면 새 관련된 행사장(대만에서 Asian Bird Fair)에서 만난다거나 한 경우이다. 아니면 온라인에서 만나게 되는 분들의 경우에도 누구랑 탐조를 가냐고 물어보시면 혼자 다닌다고 답하면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사실 혼자라기 보다 거의 언제나 남편과 동행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들의 질문이 더 신기했다. 그들의 질문에는 탐조나 출사는 보통 그룹으로 나간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서 말이다. 이는 대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어울리는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어 그런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취향이나 관심 및 성격 등 많은 면에서 정규분포 곡선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outlier이므로 보통 그런 모임에서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예로, 공통의 관심사인 모임의 주 목적이 끝나면 친교의 목적으로 뒷풀이를 가게 되는데 내 의지로는 절대 가지 않을 고깃집이나 치킨에 맥주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그런 곳에서 내가 잘 적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피할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슷하기를 기대하는 한국의 보편적인 정서를 이해하기에, 나의 음식에 대한 기호도를 반영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또한 그런 뒷풀이 자리에서 대화는 표면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어, 내게는 허비하는 시간 내지 고통의 시간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으로 보낸 적도 있지만, 대부분 내 흥미를 오래 끈 사람은 없었기에 무리를 지어 함께하는 활동은 지양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로(두 번째로 나열하였을 뿐, 실은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나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는 새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탐조 전문 여행가이드를 고용한 최초의 여행은 2018년도 부탄 여행 때인데,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새를 보면 뭔가 한참 김이 빠져 버린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여행 중반부터는 일부러 가이드를 앞질러 걸어가며 새를 먼저 찾아내고자 하였다. 역할에 충실했던 탐조 가이드 덕분에 내가 탐조 가이드를 원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게 되었다. 한적한 숲 속을 걷다가 탐조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보통 일반적으로는 같이 쳐다보겠지만, 나는 어차피 남이 발견하여 이미 관찰 중인 새를 중간에 끼어들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간다. 올 초에 뉴질랜드 웰링턴에 있는 새 보호구역 Zealandia를 방문했을 때에도 가이드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내게 새를 지목해 줄 수 있는 특권은 유일하게 남편에게만 허용하였기 때문에 남편이 나의 유일한 탐조 동반자이다.
세 번째 이유로, 새를 위해서 굳이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목적 내지 성숙한 탐조인들이 모여 소규모 탐조를 제대로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원수가 3명만 넘어가도 발자국 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속닥이는 소리 등으로 새가 위협을 느껴 금방 날아가버릴 뿐만 아니라, 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할지라도 본인을 지켜보는 수많은 인간의 시선에 극도의 경계심과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이유로, 누군가가 내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 성격때문이다. 단순히 새가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깊은 내면이 반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찌보면 아주 오만하고 바보같은 특성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으나, 무엇이던 언제나 스스로 익혀왔던 나이기에 나는 어떠한 스승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설명을 해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지녔다고 인정하는 남편에게조차 내게는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 주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필요하다면 내가 알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반사회적인 성격은 아니다. 이 한국 사회에서 강조하는 튀지 않고, 모나지 않고,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강의에 들어가거나 누군가 내게 설명을 해 주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경청한다. 그러나 그 성격은 내가 타인을 존중하기에 잠시 장착할 수 있는 성격일 뿐, 실제 나는 그 사회적 용도의 성격 뒤에서 초조하게 미소짓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전문 영역을 고작 몇 권의 책을 읽고 아는 척하지는 않으며, 내가 아는 것을 누군가가 모른다 하여 무시하지도 않으니, 설명받기를 싫어하는 내 성격이 타인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가리킨 새를 쳐다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회생활용 성격을 장착한 채 외부에서 만난 타인들에게 “왜 혼자 다니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런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을 수 없었기에, 아마 나의 무의식 어디 한 켠이 답답하여 이 불편함을 인터넷 한 구석에 남겨놓으라고 소리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