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로 인해 2월 중순에 부모님과 가려 했던 대만 여행도 취소했고, 2월 말에 떠나려 했던 이탈리아 여행도 취소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취소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로마에 있을 일정이다. 날씨도 춥고 상황도 이러하다 보니 집 근처 산책도 나갈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마트 문 앞 배송으로 버텨 왔는데 약 2주 전부터 갑자기 사람들의 사재기 강박으로 온라인 주문이 불가능해졌다. 어쩔 수 없이 2월 27일날 근처 마트를 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밖에 나가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는데, 간만에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 걸어보니 감옥에 감금되 있던 죄수가 풀려나와 자유를 만끽하며 걷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파트 정문을 나가려하는 순간 까치 한 마리가 긴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해준 징조가 새가 둥지재료를 가지고 날아오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COVID-19도 곧 끝나갈 징조인가? 그렇게 바라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마트를 향해 걷고있는데 또 다시 하늘에서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고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이제 다들 번식을 할 준비를 할 시기이지.
그런데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이들이 날아간 방향이 아파트 단지쪽이었다. 그렇다면 단지 내 나무에 짓고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입구에서부터 나무를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빙고!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해송 꼭대기에 꽤 모양새를 갖춘 까치 둥지를 발견하였다. 내 방에서 볼 수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관찰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3일이 걸렸다. 3월 1일 드디어 밖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GITZO 삼각대를 꺼내 설치하고 Sony 200-600mm 렌즈로 둥지를 확인해보니 꽤 볼만했다. 그런데 거리가 한 60미터는 돼 보여서 좀 더 가까이 보고싶은 마음에 D850에 1.4X TC를 부착한 NIKKOR 500mm pf 렌즈를 끼워 다시 셋팅하였다. 그래서 3월 01일부터 규칙적으로 이 까치 커플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까치의 번식 행동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다음과 같다.
까치의 번식
- 암수가 함께 둥지 짓기에 참여함. 암수 모두 둥지 재료를 가져오고 함께 건축을 하나 주로 암컷의 전반적 지휘 하에 이루어지고 수컷은 둥지 재료 조달에 좀 더 관여를 한다고 함.
- 건축가의 숙련도와 재료 가용 여부에 따라 둥지 짓기에는 1주~8주가 소요됨.
-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이 알을 낳고 약 3주간 알을 품음. 한 번에 2-8개의 알을 낳음(보통 5-7개).
- 수컷은 알 품기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이 기간 동안 암컷에게 먹이 조달을 함.
- 부화 후에는 암수가 교대로 새끼들에게 먹이를 가져다 줌. 이를 한자어로 육추(育雛)라고 하는데 나는 이 단어의 어감이 이유 없이 좋지 않아서 쓰지 않으려 한다.
- 둥지에서 이소는 약 24일-30일 후. 이소 후에도 몇 주간 부모 새에게 의존함.
- 가을이 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생존한 미성숙 개체는 성체들 무리에 합류함.
- 까치 둥지에도 두견이과 새들이 탁란을 한다고 함.
다음은 나의 관찰기록이다.
2020년 02월 27일
- 둥지재료를 물어나르는 것을 목격함.
- 둥지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었음.
2020년 3월 01일
- 긴 나뭇가지 위주로 두 마리가 지속적으로 둥지 재료를 물어다 나름.
- 둥지의 버팀목이 된 소나무 꼭대기에 수집한 둥지 재료 가득 쌓여있고 수시로 하나씩 둥지 기초로 사용함.
- 부리를 망치처럼 사용하기도 함.
- 둘이 협동하여 작업을 함. 한 마리가 위에서 긴 나뭇가지를 부리로 내려주면 둥지 안에 있는 개체가 이를 받아 둥지에 꽂음.
반대편 아파트에서 찍었다면 훨씬 더 잘나왔을텐데 아쉽다.
2020년 3월 02일
- 여전히 큰 골격 위주로 보강 작업을 지속함.
- 둥지 바닥재로 쓸 부드러운 풀과 진흙도 물어다 나름.
- 갑자기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자 두 마리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날아갔다가 한참 후 돌아옴. 왠지 남의 둥지에서 새끼를 잘 잡아먹는 까마귀에게 둥지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날아간 것으로 추측됨.
- 내가 관찰하는 쪽에서 보이는 방향에 난 작은 구멍으로 들락날락함. 입구가 이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함.
2020년 3월 03일
- 여전히 나뭇가지와 둥지 바닥재료를 물어다 나르고, 둥지 뼈대를 보강함.
- 내가 관찰하는 쪽으로 난 둥지의 작은 구멍으로는 더 이상 출입하지 않고 꼭대기나 반대쪽으로 출입함.
- 한 마리가 계속 상주하면서 보강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암수가 교대함. 한 마리가 일하고 있다가 파트너가 둥지 재료를 물고 돌아오면 일하던 파트너가 날아감.
2020년 3월 04일
- 내가 관찰하는 방향의 반대쪽에 입구를 낸 것이 확실해 보임(내가 관찰 중인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반대쪽으로 낸 것일까 아니면 원래 계획이 그랬을까 궁금하다).
- 여전히 나뭇가지와 진흙 및 둥지바닥 재료를 지속적으로 물어오고, 둥지를 보강함.
- 둥지 쪽으로 날아오던 중 둥지를 지나쳤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둥지에 내려앉음. 이들도 가끔 목적지를 깜빡하고 지나쳤다가 다시 뒤돌아오거나 본인의 둥지 위치를 바로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일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둥지 위아래로 삐져나온 나뭇가지가 훨씬 많아지고 둥지 벽면이 더 촘촘해졌다.
2020년 3월 05일
- 드디어 둥지 짓기가 거의 끝나가는 듯하다.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시간 동안(약 1시간~2시간) 관찰하였지만 거의 별다른 활동을 포착하지 못했다.
- 관찰하는 쪽 반대쪽으로 난 입구로 어쩌다 들락거리는 모습만 보였다.
- 반대편 아파트 건물 꼭대기에서 부리를 건물 구조물에 비비는 모습으로 보아 방금 먹이활동을 한 듯해 보였다.
2020년 3월 06일
- 둥지 안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 움직임이 계속 보임.
- 한참동안 둥지를 다듬다가 날아가버리면 그 사이 파트너가 와서 다시 마무리 작업을 이어가는 듯해 보임.
- 두 마리가 동시에 둥지에 머무르며 같이 작업하는 모습도 보임.
- 여전히 진흙과 작은 재료들을 가져옴.
2020년 3월 07일
- 까치가 둥지를 떠나자마자 진박새(coal tit) 한 마리가 날아와서 둥지 주위를 확인함. 혹시 까치가 둥지 재료로 사용하는 진흙 등에 섞인 벌레라도 찾아 먹으려는 전략같아 보임.
- 두 마리가 동시에 도착한 모습도 포착함. 한 마리른 긴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음.
- 둥지 짓기 초기 단계에 비해 큰 활동이 포착되지는 않음. 아무래도 내가 관찰하는 쪽으로 출입하지 않고 큰 나뭇가지로 보강하는 단계는 지났기 때문임.
- 둥지 반대편으로 가서 둥지를 쳐다보며 사진을 찍어 둠. 하지만 혹시라도 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그간 공들인 둥지를 버리고 가거나, 다른 사람들이 까치 둥지를 눈치채고 혹여 둥지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낼까봐 아주 잠깐동안 밖에 관찰할 수 없었음. 내가 둥지 아래에서 보는 동안 까치는 둥지 안이나 근처에 없었는데, 왠지 저 멀리서 나를 다 관찰했을 것 같았다.

돔 형태인지 컵 형태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둥지 꼭대기에서 바로 쑥 들어가기도 하는 걸 보면 컵 형태인 듯함.
둥지는 지상에서 약 15미터 정도 높이의 소나무 꼭대기에 마련되었다.
2020년 3월 08일
- 여전히 둥지 짓기 마무리 작업에 열중함.
- 두 마리가 외출하여 동시에 함께 돌아오는 모습도 보임.
- 그러나 3월 02일날 까마귀 소리를 듣고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간 사건 외에 한 번도 두 마리가 동시에 둥지를 날아가는 모습은 보지 못함.
2020년 3월 09일
- 여전히 둥지에 들러 둥지 안쪽에서 무언가 작업을 계속함.
- 큰 작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둥지 안팎에서 눈에 띄는 활동이 없음. 따라서 이제 1시간 넘게 영상촬영을 해도 별달리 남길 기록이 없음.
2020년 3월 10일
- 비가 옴. 두 마리 모두 둥지가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깃털 다듬기하는 모습을 확인함.
- 둥지 안팎에서 이들의 활동은 확인하지 못함.

2020년 3월 11일-31일
- 한 마리는 둥지 안에 있고, 다른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오는 모습이 포착되기 시작함.
- 암컷이 드디어 알을 낳을 준비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알을 낳기 시작했고 수컷이 먹이를 가져다주는 듯함.
- 둥지를 지키는 개체(암컷으로 추정됨)가 가끔 둥지를 비우는 경우도 종종 목격됨. 둥지가 내려다 보이는 반대편 건물 꼭대기로 날아감.
- 근처 빌딩에서 놀고있는 비둘기들을 반복적으로 쫓아내는 모습을 목격함.
- 3월 21일: 짧은 가지를 물고 와서 둥지를 보수하는 모습을 목격함.
- 3월 24일: 까마귀 소리와 까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확인해보니 까치 한 마리가 까마귀 한 마리를 근처 일대에서 쫓아 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둥지 바로 옆 나무에서 경계의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까마귀는 확실히 이 까치 둥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고 종종 염탐하러 오는 듯하다.
- 3월 25일: 한 마리가 둥지 내에 있고(아마도 암컷), 다른 한 마리가 들락거린다(아마도 수컷). 들락거리는 개체의 부리에 먹이가 물려있거나 하는 것이 확실히 보이진 않았다.
- 3월 27일: 여전히 둥지를 보수하는 행동을 종종 보인다. 주로 지붕을 덮으려는 작업으로 보인다.
- 3월 31일: 여전히 한 마리는 둥지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한 마리는 작은 가지 등을 물어와서 둥지 보수 작업을 한다.
4월 1일-4월 15일
곧 암컷이 알을 낳고 부화를 시작하면 한참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 같아 관찰을 중단했다. 또한 마침 일 때문에 창 밖을 내다볼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4월 16일-4월 24일
하핫…왠지 둥지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4월 24일엔 둥지가 확실히 비어 있음을 확인했다. 까치가 전혀 둥지에서 나오는 것도 보이지 않고 들어가는 것도 보이지 않고, 둥지 안에 있다면 실루엣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둥지 안에 아무런 실루엣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박새 한 마리가 둥지 안까지 자유롭게 들락날락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였다. 까마귀가 자주 나타났었는데 알을 놓자마자 이들이 알을 먹어버렸거나, 뻐꾸기가 알을 낳아서 까치가 둥지를 버렸거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까치 커플이 이 둥지를 버린 것이 확실했다.
하아…바쁘다보니 창 밖을 내다볼 여유도 없다니! 내 삶도 참 고달프구나.
5월~6월
기존 둥지에서 얼마 안 떨어진 나무에 몇 년간 튼튼한 모습을 유지한 까치 둥지가 하나 더 있는데, 까치가 그 둥지 근처로 자주 앉아있고 날아오는 것으로 보아 옛날 둥지에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새 둥지는 까마귀나 뻐꾸기를 혼돈케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공을 들인 새 둥지에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6월 7일
최근 한 일주일 까치가 유난히도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평상 시 울음과 완전 달랐다.
“입주민 여러분, 소음 민원이 자주 들어오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지르지 말아주세요.”라는 방송을 까치들에게 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이들의 목소리는 아주 요란했다.
대체 까치가 왜 이러나 싶어서 창 밖을 내다보는데 까치가 오래된 예전 둥지 아래 나뭇가지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까치가 앉은 나뭇가지 아래 화단 바닥에 무언가 희고 검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예사롭지 않아서 망원경으로 내다보았다. 안전펜스 때문에 렌즈에 상이 잘 맺히지 않아, 안전펜스 위로 몸을 내뻗어 위험한 자세로 망원경을 잡고 확인한 결과, 까치 사체였다!
당장 일층으로 내려가서 화단에 놓여져 있는 사체를 확인하였다.

자라나기 시작한 깃털, 짧은 꽁지깃, 어린 down 털, 광택없는 머리깃으로 보아 둥지를 갓 이소한 까치였다. 색깔좋은 파리들이 사체를 즐기고 있었고, 사체는 대략 일주일은 지난 듯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사체를 확인하는 동안 까치 커플이 극도의 공격성을 표출하는 행동들을 보였다. 예를 들어, 부리로 가지를 내리찧고, 나뭇잎을 마구 꺽어서 떨어뜨리고, 계속 울부짖었다. 새끼를 잃은 데에 대한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것 같았다. 이 까치커플은 성과없이 둥지를 한 차례 옮긴 이후에도 이런 결과를 맞게되어 스트레스가 상당한 듯했다. 이 날 이후로도 약 2주일 간은 분노와 슬픔이 가득 담긴 듯한(인간의 느낌으로는 그렇게 들렸다)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후 이들은 다른 나무에 다시 번식을 시작하기로 한 듯해 보였다.
이들의 스트레스 행동을 담은 영상의 배경에 어울릴 음악이 없어 내가 직접 이들을 위해 간단히 만들었다(영상 후반부에 삽입).
다음 해에는 무탈히 번식에 성공하길 빌어줄게, 까치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