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영어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장벽은 이 사회에서 아주 많이 목격된다.
예를 들어, 내가 근무하던 대기업에서 인도지사 상무가 1년간 출장을 와 있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인도인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고, 이 인도인은 언제나 내게 맡겨졌다.
모두가 이 인도인을 기피한다는 사실은 명백하였고, 이 인도인도 이를 인지하고 나에게 이렇게 불만을 호소하였다.
“내가 인도말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글로벌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하는데, 왜 모두가 영어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 회사에서 하는 많은 프로젝트가 글로벌 프로젝트이고, 대한민국에서 손 꼽는다는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영어로 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못 본 척하려고 한다.”
소위 영어 울렁거림증이 없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하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그룹에서 이러한 영어 기피증은 명백하였고, 이는 교육 수준이나 외국문화 경험치와도 관련성이 없었다.
문제는 대부분 영어로 기본적인 문장 이상을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지인들은 내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는 실례를 정말 자주 범했다(다들 고등교육 받고 대부분 해외유학도 함).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다. “내가 영어가 짧아서…, 이해해줘.” 그러나 이 마저도 그들이 직접 남편에게 영어로 전달하지 않고 내가 중간에서 전달해주기를 바랬다.
반면 남편 친구들은 언제나 내가 참석한 이상 영어로만 대화하고, 혹여 폴란드어를 써야할 경우에는 양해를 구하고 잠깐 이야기하는 데에 그쳤다. 남편의 한 지인은 바쁜 의사의 일정을 쪼개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영어스피킹 개인레슨을 받고오기까지 했다.
남편의 모든 친구가 일관되게 국제매너를 겸비한 것과 달리 동일수준의 교양을 갖추었을 것으로 기대되는 한국의 지성인들은 영어병을 핑계로 유아기적 모습을 보여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인 영어병의 근원을 파헤쳐보면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다는 철저한 자기애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남이 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체면을 구기지 않을까, 타인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이 어떠한가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언어만 다르지 똑같은 심장을 가진 한 인간 개체를 앞에 두고 본인 이미지에만 침잠하는 바보가 된다.
서툰 말투로도 상대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통가능하다. 열린 마음을 가진 한국인들은(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언어 구사력에 상관 없이 몸짓, 발짓을 섞어가며 소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제 커플로서 한국에 5년을 거주하며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영어병을 핑계로 소통의 채널을 굳게 닫고 어색한 침묵을 선호하거나 비문화인처럼 그들만의 언어로 지껄이는 자들은 의외로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고, 소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이들에게서 더 자주 관찰되었다.
본인은 영어가 서툴러서 그렇다고 이해해 달라고 하지만, 이는 본인의 서툰 영어를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을 이해해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국에서 지겹도록 들어 온 “영어 울렁거림”이라는 것은 사실 “불완전한 내 모습 보여주기 싫음”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상대에게 관심이 있고, 상대를 존중한다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은 전달이 된다.
적어도 외국인을 면전에 두고 외국인을 공기 취급하는 이런 매너는 바꾸어야 한다. 심장이 뛰는 한 인간을 앞에 두고 침묵을 지키거나 상대를 외면하고 한국말로만 떠드는 것은 역겨운 민족주의적, 자아중심적 태도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
대부분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타이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자아도취되어 스스로 행복하다는 마약을 주사하고 있으나 내면은 외적 자아와 불일치하는 존재의 비루함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